약자에 대한 차별과 공격이 만연
결과적으로 강자만을 위하는 사회
확실히 격차 사회가 나타나면서 젊은층의 빈곤율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년 세대의 책임이 아니라 잘못된 정치의 결과일 뿐이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를 만든 것 역시 노년 세대의 책임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사회에 대한 불만의 화살을 보통은 정치가에게 돌리는 게 정상인데, 왜인지 그렇게 하지 않고 노년 세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점에 문제의 뿌리가 단단히 박혀 있다. 현재 사회에는 세대와 세대가 분단된 ‘노약(老若)’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도 세대 간의 단절은 있었다. ‘요즘 애들은~’, ‘노인들은 생각이 꽉 막혔어’라는 말은 각 세대 사람들이 흔하게 말하는 문구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각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데올로기나 가치관의 차이에서 세대 간 단절이 생긴 것이지, 결코 나이가 들었다는 것 자체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았던 적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사회는 다름 아닌 부와 권력을 쥔 한 줌의 ‘노년 세대’들이 주도하고 있다. 그들은 같은 세대 대중들의 마음에 전혀 공감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가난한 젊은이들 또한 그들의 안중에는 없다. 정말이지 최악이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가난하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했다
노년 세대가 소년기일 때 도시부에서는 가난한 살림살이지만 다들 드디어 지붕이 달린 집에 살았고,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학용품이나 옷은 손위 형제자매에게 물려받아 썼고, 옷이 찢어지면 기워 입는 것이 당연했다. 또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집안에 욕실이 없어서 공중목욕탕에 다녔다. 대학생이 되어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욕실도 없는 1.5평에서 2평짜리 방이 딸린 목조 아파트에서 살았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노년 세대들에게 물어보면 그 당시에는 아무도 가난하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똑같았기 때문이다. 공동체에서 이러한 집단 심리는 매우 흥미로운데, 사회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생각할 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공정한 경쟁 환경 속에서 개인의 노력과 창의력을 갈고 닦아 부를 얻는 것은 무엇 하나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부는 시장이라는 이름의 ‘일반 대중’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공한 사람이 얻은 부의 일부를 세금이라는 형태로 대중에게 환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인간의 신체 기능은 20세를 정점으로 서서히 쇠퇴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는 일도
인체는 60조 개가 넘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인간의 수명이란 세포의 수명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노화란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 세포들이 망가지거나 감소하여 형태적 혹은 생리적으로 신체가 쇠퇴하고 전체적으로 생리 기능이 저하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노화에 따른 구체적인 변화는 이렇다. 형태적으로는 키가 줄어들거나 척추가 굽고 피부가 처지거나 주름이 생기는 것을 말하고, 생리적으로는 시청각에 불편이 생기거나 기억 장애, 운동 능력 저하, 병에 대한 저항력(면역력)의 저하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변화는 모두 세포가 노화하거나 죽으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무엇보다 노화가 뚜렷이 나타나는 시기나 정도에는 개인차가 상당히 크다. 오로지 세포에만 한정해서 보면 나이가 들면서 온몸이 점점 쇠퇴해 간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살짝 비유가 조잡할 수도 있는데, 세포 안의 대사 경로에 여러 이물질이 쌓이면 어떤 조직이든 그 기능이 하루하루 저하되어 간다는 것이다. 조직을 구성하는 세포의 수 자체는 평생 그렇게 차이는 없다. 세포가 분열하는 횟수는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데, 그 횟수에 도달하면 그 이상 늘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60대 중반의 남성 이야기
하나 소개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소외감이나 고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 스스로 소외를 당해서 고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고독과는 인연이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그는 중독까지는 아니지만 술을 좋아한다. 일상생활에서 특별히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술은 혼자서 마신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자주 가는 술집은 여성이 없는 카운터 바인데 바텐더도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말 시키는 일은 없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손님을 내버려 두는 요컨대 손님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술집이다. 그는 그 술집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회사에 다니던 시절부터 수십 년 동안 일주일에 서너 번씩 꾸준히 다녔다. 혼자 카운터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면서 그날 하루 있었던 일들이나 마음에 걸리는 일을 생각하기도 하고, 옛 추억이나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며 향수에 잠긴다. 심각한 걱정거리나 불안이 있을 때는 가능하면 손님이 많은 큰 대중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게 최고라고 덧붙인다. 익명성이 있어서 마음이 편안하달까, 낯선 사람들 속에 있으면 고독을 느낄 수 있으며 주변에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고독감은 한층 깊어진다고 한다. 인생에는 가까운 사람을 포함해서 타인에게 상담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고민이라는 게 있다. 그럴 때는 의도적으로 고독한 상태를 먼저 갖춘 다음, 울적한 마음이 들더라도 고민과 마주한다고 한다. 철저히 혼자서 해야 한다. 그러면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어 포기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정신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 보인다고 그는 말한다. 마음만 정리되면 이제 해야 할 행동도 명료해지므로 곧장 행동으로 옮긴다. 이는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른바 ‘나 홀로 모리타 요법’이라고 해도 좋을 대처법이 아닐까?

팬데믹의 한가운데에서
이 책의 집필에 끝이 보이기 시작한 3월, 갑자기 중국 우한에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전 세계를 끌어들인 팬데믹(대유행)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이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2002년에 똑같이 중국에서 발생한 사스(SARS) 코로나 바이러스와 비교하면 전염력이 강해서 선진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세계 전역으로 퍼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고령자나 수술 등으로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들을 직격하여 발병 후 단기간 내에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의 백신은 없다. 따라서 각국의 주요 방역은 고전적인 격리 정책이다. 경제 활동이나 이동을 ‘자숙’하는 것과 집에 머물며 밖에 나가지 말라는 ‘스테이홈’이 현재 유행어가 되었는데, 이러한 정부나 지자체의 요청은 사회 고유의 동조 압력과 어우러져 감염 억제에 일정한 효과를 내고 있는 듯하다. 반면 이러한 상황은 고령자에게 우울증이나 치매 발병, 보행 능력 쇠퇴 등 위험을 만들어 내는 최악의 환경이기도 하다. 지극히 낮은 확률의 ‘죽음’과 천천히 진행하는 많은 ‘죽음’ 가운데 대체 무엇이 더 심각한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물론 감염 억제는 중요하지만 ‘자숙에 따른 위험’을 줄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요컨대, 팬데믹에 대항하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는 이상, 더 종합적인 관점으로 차선책을 강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바이러스와 공존하면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고령 분들은 방에 틀어박힌 채, 삶의 질이 확실히 떨어지는 것에는 유의했으면 한다. 아무튼 고령 분들은 사람이 극도로 밀집하는 장소를 피하고 마스크를 쓰고 외출에서 돌아오면 손을 씻는 기본을 덤덤하게 지키면서도 매일 한 번은 밖에 나가 햇빛을 쐬도록 하자.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고 면역력을 유지하자. 인터넷이든 전화든 좋으니 가능하면 남들과 대화를 하도록 하자. 이번 팬데믹을 계기로 인간의 행동 양식을 보고 있노라면 의료나 정치, 경제 등의 틀을 넘어 어떠한 문명론적인 명제를 묻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공황 속에서 인간은 쉽게 그 본성을 노출한다. 반지성적인 정동에서 생기는 공포, 차별, 폭력, 억울, 광기 등 평상시에는 숨어 있던 어두운 부분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 같다. 그것은 개인, 집단, 국가라는 레벨을 따지지 않고 나타난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적인 정동은 세계적 규모로 증폭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번 팬데믹으로 분명해 진 것은 사망자 수라는 눈에 보이는 피해보다 집단 심리의 움직임이 훨씬 더 사회를 파괴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정신이란 이렇게나 복잡하고 기괴하다는 사실을 정신과 의사로서 새삼 느꼈다.
이 책의 독자들은 늙는 것, 병드는 것, 죽음을 맞이하는 것의 본질을 이해하고 고령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받아들이며 부디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